문장으로 읽는 마음 한 줄

사람과 삶에 대한 믿음

텅빈충만, 상선약수 2021. 11. 19. 16:40

  

#.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17)

 

#.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44)

 

#.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44~45)

 

#.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05)

 

#.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109)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가 한강이 제주 4·3’을 소재로 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고투와 존엄을 그린 작품이다.

이념적 잣대를 차치하고, 오래지 않은 비극적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길어 올린, 그럼에도 인간을 끝내 인간이게 하는 간절하고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가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 이미지와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에 실려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이 소설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다. 그 사랑은 우선 마지막까지 사람과 삶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던, 그것이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환하고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알게 된다. 그 사랑이 지극하고 간절한 만큼 그것은 무엇보다 무서운 고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

[황보 승남 hbs5484@hanmail.net 사진 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