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읽는 마음 한 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

텅빈충만, 상선약수 2020. 5. 25. 12:39

“사직서라는 글씨를, 그것도 한자로 최대한 정성스럽게 써서 내니 기분은 최고였다. 지리산 노고단이 보이는 곳에서 드디어 내 맘대로 살 수 있게 된 거다!”

 

기자 출신 원유헌(51)씨의 에세이집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는 ‘귀농 적응기’다. “다들 그렇게 산다지만 다들 그래야 하는 게 싫었다. 나는 후퇴를 꿈꿨다.”

 

서울 토박이인 저자는 직장에 청춘을 바쳤다. 자본주의와 조직, 도시생활은 ‘더 이상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다. 마흔 넷에 가족과 함께 전남 구례로 갔고, 다시 청춘을 사는 중이다.

 

“맨 처음 정한 목표를 이루었다. 후퇴. 싫은 것과 거리 두기, 미운 사람 안 만나기, 나쁜 짓 안 하기, 돈 없으면 가만히 있기. 뒷걸음질만 한 건 아니다. 착하게 농사짓기, 많이 도와주기, 음악 듣기, 책 읽기, 마을 회관에서 밥 많이 먹기.”

 

소농의 삶은 그리 쉽지 않다. 토란 캐고, 양파 심고, 울금 뽑고, 쌀 도정하여 포장하고, 눈처럼 흩뿌려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야근’을 한다. 못자리 작업하는 흙투성이 발에는 색색의 꽃이 떨어지는 소박한 낭만이 존재한다.

 

시골 인심에 대한 험한 소리도 들리고 그런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사람의 힘, 사람들 덕에 산다. 그래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괴롭진 않다.”

 

그 속에서 묻어나는 깊고 진중한 이웃에 대한 염려와 배려들. 삶은 어디에서나 같다고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곳이어도 외롭거나 괴롭지는 않은 내 고향에 잠시 다녀온 듯.

 

시골 촌부들이 무심코 주인공에게 던지는 말. "천천히 시나브로 허소. 빨리 헌다고 더 잘 단가? 미루고 미루다가 안 헐 수 있으면 그거이 더 좋은 거여. 안 근가?” 그저 유쾌하고도 따뜻하다. 2020.4

[황보 승남 hbs5484@hanmail.net 사진 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