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시대의 주역, 보건소장

송 태선 한국만성질환관리협회 회장

텅빈충만, 상선약수 2013. 4. 24. 10:00

 

‘머리 속의 지혜는 남을 이롭게 한다”

 

 

 

“국민훈장모란장은 아내의 몫을 대신 받은 것”이라는

송 회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열심히, 욕심내지 말고,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십시오.”

   

개인적으로 송 태선 회장을 만나면서 세 번 놀란다. 먼저, 1933년생이니까 올해 81세인데도 체력이 너무 좋다. 몇 시간을 얘기해도 꼿꼿이 앉아 힘든 기색이 없다. 두 번째는 놀라운 기억력이다.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새로운 단어, 용어를 많이 이야기해야 하고, 협회의 일을 맡다 보면 여러 현안이 많아 과거의 일들을 참조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그때마다 그 기억력에 경탄할 때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남을 이해시키는 능력이 띄어나다. 차분하지만 때로는 구수하게, 때로는 단호한 목소리로 논리정연하게 말을 풀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놀랍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에둘러 말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논거가 붙는다. 감성은 팔딱팔딱 스무 살 청춘이고, 깊은 성찰은 이백 살 현자다. 그 감성에 통찰이 더해지니, 철학이 된다. 혀끝의 말로써 지혜의 말에 대적할 수 없으니, 어쩔 것인가.

 

#1. ‘머리 속의 지혜는 남을 이롭게 한다”

경북 성주에서 출생한 송 회장은 유복한 가정에서 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인술봉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재물은 욕심을 낼수록 더 큰 문제를 야기하지만 머리 속의 지혜는 두고두고 남을 이롭게 한다.”는 선친의 가르침에 따라 의과대학을 입학했다. 그래서 5형제 중 1명은 의사, 2명은 약사가 됐다. 유년시절, 이웃에 비해 부유했던 집안 형편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친께서는 매일같이 가난한 이웃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더불어 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덕택으로 6.25전쟁으로 핍박했던 시절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송 회장에게서 봉사라는 생활이 몸에 밴 연유다.

 

1959년 전남의대를 졸업하고, 1971년 가톨릭의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10여년의 군의관 생활을 거쳐 1968년 송 내과의원과 1977년 의료법인 국민병원(의원)을 설립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50여년 동안 평생을 환자들과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했다. 일찍이 자신의 병원을 비영리 의료법인으로 만든 것도 이러한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다.

 

1959년 의대를 졸업하고, 육군 제15육군병원에서 재직 당시 사라호 태풍으로 밀양시 전 지역이 침수되었을 때 20여일간 밤을 꼬박새우면서 수재민 무료진료에 나썼던 일이나, 제15사단 근무 시 전방지역의 무의촌 주민진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일, 그리고 1960년대 수도육군병원 내과과장으로 재직 하면서 콜레라 예방과 방역사업을 위해 서울역과 청량리역을 번갈아 가면서 동분서주했던 기억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2. 원폭피해자를 위한 헌신적 활동

1968년 군복무를 마치고 신촌 로타리에서 송내과의원을 개원한 것은 송 회장이 의사의 길을 천직으로 알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감동의 드라마를 알리는 전기가 된다. 일생의 사업으로 추진해왔던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위한 봉사활동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로 인한 피해자는 70여만명. 그 가운데 7만명이 한국인이었고, 4만명은 폭사했다. 생존한 3만여명 중 2만3천여명이 귀국했고, 아직까지 2천7백여명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 조인으로 당시 이들에 대한 정부나 국민의 관심은 全無한 상태.

 

송내과의원은 원폭환자들의 유일한 무료진료 공간이었다. 그러나 무료진료만으로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 내의 여론 환기가 무엇보다 중요 했다. 한강라이온스클럽 회원으로 있으면서 15년 간 자비를 들여 수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라이온스라는 봉사단체의 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 야마구치라이온스클럽과의 자매결연은 원폭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제적 지원 창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72년에는 아사히신문 등 일본 굴지의 5개 신문사와 TV 방송 등에 출연,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원호 및 원폭피해자 병원 건립의 절박함을 호소하여 일본 전역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한국인 원폭 피해환자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송 회장은 1972년 아사히신문 등 일본 굴지의 5개 신문사와 TV 방송 등에 출연,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원호 및 원폭피해자 병원 건립의 절박함을 호소하여 일본 전역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한국인 원폭 피해환자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3. 원폭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 제고

이러한 활동으로 마침내 1973년 6월 일본 라이온스클럽 연차총회에서는 당시 10억〜13억엔 규모의 막대한 모금활동을 전개하게 되고, 이 기금으로 10월 중 한국에 원폭병원을 건립한다는 결의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사회적인 공감대도 커 재일교포 사업가인 김두일씨(사단법인 한국인 원폭피해자 구원 국제협회 상무)는 송 회장이 1차로 진료를 끝낸 원폭 피해 환자 가운데 연간 40명을 일본으로 초청, 왕복 여비는 물론 일체의 경비를 부담하여 치료해줌으로서 일본 내 원폭 피해자의 실상을 알리는데 촉매제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기도 했다.

 

또한 재일교포 김추호씨와 일본인 久保孝씨 등은 한국에 관광차 둘렀다가 여행경비를 절약하여 기금을 전달했으며, 일본 후꾸다전자(주)에서는 원폭피해 환자들의 진료를 위한 심전도를 기증하는 등 연일 언론의 미담 기사를 장식하기도 했다.

 

송 회장의 이러한 노력은 원폭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태부족했던 국내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디딤돌이 되었다. 특히 원폭투하 당시의 참상과 평화의 존엄성, 피해자의 인권, 그리고 한국 피해자의 차별 대우 등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서 원폭피해자협회 등 각종 사회단체의 활동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 만성질환 예방 및 관리 사업에 정열

송 회장의 198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는 만성질환의 예방 및 관리 사업에 정열을 쏟아 붙는, 의사의 길을 천직으로 알고 걸어 온 인생의 불꽃같은 시기다.

 

1985년 만성질환관리협회의 전신인 사단법인 한국성인병예방협회의 감사를 맡으면서 시작된 인연은 2004년〜2010년까지 6년 간 부회장으로, 이후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만성질환관리협회가 명실상부 국가 법정단체로, 각종 만성질환 예방사업의 중추적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협회의 고유사업으로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전국 보건소 만성질환 담당자교육, 전국보건소장 및 시도 보건정책과장 교육, 전국 보건소 진료의사 워크숍, 전국 보건소 고혈압‧당뇨병 관리사업 워크숍, 전국 보건소 심뇌혈관질환 및 아토피천식 예방관리사업, 그리고 비만클리닉 시범사업 평가대회 등. 현재 정부의 만성질환 예방관리 사업이 보건소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협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던 것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과 더불어 정부의 각종 사회단체에 대한 국고보조금이 중단 또는 대폭 삭감됨으로 인해 협회의 사업수행에 상당한 차질이 불가피했던 시절, 관련부처를 직접 방문하여 만성질환 예방관리 사업의 중요성을 일깨움으로서 2012년도 5천만원, 그리고 올해부터는 1억원의 국고보조금을 확보하여 사업 추진이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5. “영원한 젊은이”

 

 

 

송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에게 ‘영원한 젊은이’란 말을 종종 한다. 어떤 자리, 어떤 조건에 갖다 놓아도 젊은이의 패기와 열정으로 무엇인가를 조직하고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 그 단적인 예가 송 회장이 정열적으로 추진했던 국제병원의 건립 구상과 아직도 필생의 사업으로 현재 진행형인 실버타운의 조성 계획이다.

 

국제병원의 설립 구상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1980년에 추진했던 사업으로 당시에는 엄두도 못 내었던 일이었다. 5백 병상 규모로 당시 사우디아리비아 왕립병원 건립을 지원했던 미국의 은행이 거액의 파운데이션을 제안해오기도 했다. 1983년 마스트플랜을 완성하고, 막상 건립에 착수하였으나 당시 우리 정부의 외환상환 계획 등 법적‧제도적 국내 여건이 미비하여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현재 이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외환자 유치 프로젝트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음에 비춰 “너무 안타까웠다”는 것이 송 회장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만큼 진취적이었던 셈이다.

 

송 회장이 구상하는 실버타운은 사람 중심의 토탈 케어 서비스를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으며, 점차 고령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할 것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주변을 둘러보면 정작 믿을 수 있는 실버타운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역사회와의 유기적인 협력체계를 기본으로 유비쿼터스 컨트롤을 통한 첨단 안전 관리 시스템, 사람과 공간을 배려한 디자인, 교육연계 프로그램 등. 건강한 삶을 최우선으로 최첨단의 진료서비스는 물론 복지, 여가, 운동, 영양 등 각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계한 실버타운의 건립을 구상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추진해왔기 때문에 제도적인 부문만 해소되면 곧 바로 건립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6. “열심히, 욕심내지 말고”

오랫동안 만성질환 관리협회 업무를 함께 해 온 이강찬부회장은 송 회장에 대해 “당신 생각을 꾸밈없이 말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점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하고 만나서 얘기해보면 참 올 곧게 사시는구나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같이 일하다 보면 굉장히 남을 배려해주고 베풀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러는 점이 참 좋습니다. 아주 서민적인 모습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안는 성격을 가진 분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송 회장은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명절 때면 주위의 노점상 등 어려운 이웃에게 어김없이 작은 선물을 전한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정장에 넥타이 차림은 변함이 없다. 닳아진 귀퉁이에 색까지 바랜 수천장의 진료 기록 카드들, 손 때 묻어 모서리까지 둥글게 변한 책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환자들이 앉았다 일어난 회전용 진료의자. “국민훈장모란장은 아내의 몫을 대신 받은 것”이라는 송 회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열심히, 욕심내지 말고,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십시오.”